마르쿠스 안토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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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83년 로마에서 태어난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갈리아 전쟁에 참여했고, 카이사르 사후에는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통치하며 클레오파트라와 연인 관계를 맺었으나, 옥타비아누스와의 권력 다툼 끝에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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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제2차 삼두정치
제2차 삼두정치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카이사르 암살자 복수와 공화정 재건을 명분으로 결성한 5년 권한의 정치 동맹이었으나, 숙청, 자금난, 내분, 전쟁 등을 거치며 옥타비아누스의 단독 권력 장악으로 이어졌다.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안토니우스의 내전
안토니우스의 내전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탁을 명분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여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고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정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 기원전 30년 사망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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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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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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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로마자 표기 | Marcus Antonius |
출생일 | 기원전 83년 1월 14일 |
출생지 | 로마, 로마 이탈리아, 로마 공화국 |
사망일 | 기원전 30년 8월 1일 (53세) |
사망지 | 알렉산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
사망 원인 | 자살 |
안장 장소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아마도 이집트) (위치 미확인) |
국적 | 로마 |
출신 계급 | 플레베스 (노빌레스) |
씨족 | 안토니우스 씨족 |
종교 | 아우구르(기원전 50년-30년) |
관직 | |
레가투스(카이사르 휘하) | 기원전 52–51년 |
호민관 | 기원전 49년 |
프로프라이토르 | 기원전 49년 |
기병대장 | 기원전 48년 |
집정관 | 기원전 44년 |
프로콘술(갈리아) | 기원전 44–40년 |
삼두 | 기원전 43–33년 |
집정관 | 기원전 34년 |
플라이페투스 | 기원전 57-55년 |
쿠아에스토르 | 기원전 52년 |
가족 | |
배우자 | 파디아 안토니아 히브리다 미노르 (?-기원전 47년) 풀비아(기원전 46–40년) 옥타비아 미노르(기원전 40–32년)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32–30년) |
자녀 | 안토니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 율루스 안토니우스 안토니아 마요르 안토니아 미노르 알렉산더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 |
부모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와 율리아 |
군사 경력 | |
소속 | 로마 공화국 율리우스 카이사르 |
복무 기간 | 기원전 54–30년 |
참전 전투 |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포룸 갈로룸 전투 무티나 전투 해방자들의 내전 파르티아 전쟁 아르메니아 전쟁 악티움 전쟁 악티움 해전 알렉산드리아 전투 |
지휘 | 제13군단 제미나 |
2. 생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83년 1월 14일 로마에서 플레브스(평민) 계층인 안토니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2][3][4] 그의 아버지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척인 율리아였다.[5] 기원전 82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로마를 공격했을 때 안토니우스는 유아였다.[6]
안토니우스의 아버지는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평을 받았으며,[7] 기원전 74년 지중해 해적 진압 임무를 맡았으나 실패하고 기원전 71년 크레타에서 사망했다.[5][7][8] 아버지 사후 안토니우스와 형제들은 어머니 율리아 슬하에서 자랐다. 율리아는 후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와 결혼했는데, 그는 기원전 63년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했다.[9]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젊은 시절 로마를 돌아다니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8] 키케로는 그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와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비난했다.[10]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무리와 어울렸으며,[13] 루페르칼리아 제전에 참여하기도 했다.[14] 20세 무렵 막대한 빚을 지고 빚쟁이들을 피해 기원전 58년 그리스로 도망쳐 아테네에서 철학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기원전 57년, 안토니우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군대에 기병대장으로 합류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15][16] 유대에서 하스모네아 왕조 내분에 개입, 히르카누스 2세를 지원하고 알렉산드레를 상대로 승리하여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17][18] 기원전 55년에는 가비니우스와 함께 이집트 원정에 참여,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키는 데 기여했다.[18]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때 안토니우스는 훗날 자신의 연인이 되는 클레오파트라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24]
안토니우스는 파디아, 안토니아, 풀비아, 옥타비아, 클레오파트라와 차례로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156][157] 옥타비아와의 딸들을 통해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황제의 조상이 되었다.
2. 1. 어린 시절
기원전 83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은 모두 그와 같은 이름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인데, 할아버지는 당대의 유명한 웅변가로 기원전 86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로 복귀했을 때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처형당했다.[5] 그의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뻘인 율리아 안토니아였다.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가 죽자 어린 안토니우스와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로마의 거리를 쏘다니며 방탕한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8] 로마에서 안토니우스는 엄청난 빚을 지고 도망하듯 그리스로 건너가 수사학을 공부했다.
2. 2.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기원전 54년경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기병대 지휘관으로 갈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나, 방탕한 성품으로 카이사르를 종종 বিরক্ত하게 했다. 카이사르의 호의로 원로원에 들어갔으나, 원로원과 카이사르의 사이가 나빠지자 원로원에서 추방되어 카이사르 진영에 합류, 루비콘강을 건널 때 함께 했다.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좌익 기병대를 지휘하며 폼페이우스 군대에 맞서 싸웠다.[27]기원전 47년 카이사르가 독재관에 취임하고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 잔당을 축출하는 동안 이탈리아반도 통치를 맡았으나, 키케로가 지적했듯이 예산 낭비가 심해 시민들의 반감을 사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2년간 카이사르와 왕래가 없다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다섯 번째 집정관 임기 때 동료 집정관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15일 카이사르는 암살당했고, 안토니우스는 혼란 중에 로마를 탈출했다. 곧 로마로 돌아와 카이사르를 변호하며 여론을 반전시켰다. 6월에 카이사르 군대에 힘입어 키살피나 갈리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43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군권을 주고 그해의 집정관 두 명과 함께 안토니우스를 공격하게 했다. 4월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패하고 나르보넨시스로 퇴각했다. 두 집정관이 죽고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차지하자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집정관직을 수여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진군해 집정관에 취임했다. 안토니우스는 레피두스와 합세하여 세력을 불렸다.
기원전 52년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공직인 재무관에 선출되어 원로원 의원으로 첫발을 내디딘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카이사르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알레시아 전투에서는 레가투스(총독 대리)로서 동료인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와 연계하여 전선을 지탱하고 승리에 공헌했다.[27]
기원전 50년 로마로 돌아와 아우구르(점복관) 선거에서 카이사르의 정적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물리치고, 다음 해 기원전 49년 호민관에 취임하여 원로원에서 동료인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영문)와 함께 거부권을 행사하여 반카이사르파에 저항했다.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의 거부권으로 원로원이 기능 불능에 빠지자, 반카이사르파는 원로원 최종결의를 발령했다. 거부권이 무효화된 안토니우스는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루비콘 강 부근에서 카이사르와 합류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 등 반카이사르파와 싸울 것을 결심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지휘하에 술모를 함락시키는 등의 활약을 한 후 법무관 대리의 지위를 받고, 이탈리아 본토에서 후방을 책임졌다. 기원전 48년 듀라키온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좌익을 지휘하여 카이사르의 승리를 뒷받침했다.[40]
파르살루스 전투 승리 후,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를 마기스테르 에퀴툼(기병대장)에 임명하여 로마의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로 향했다. 기원전 47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도라벨라가 채무탕감을 내세워 시민들을 선동하여 포룸에서 폭동을 일으키자, 안토니우스는 무력으로 폭동을 진압했다. 그러나 이 폭동으로 시민 800명 이상이 희생되고, 그 이전의 지나친 방탕 때문에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이집트에서 귀환한 카이사르의 불만을 사서 레피두스에게 역할을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어, 일시적으로 냉대를 받게 되었다.
2. 3. 카이사르 암살과 그 이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왕위를 노린다는 혐의로 원로원에서 암살당했다. 이 혼란 중에 안토니우스는 노예로 변장하고 로마를 탈출하였다. 곧 로마로 돌아와 카이사르를 변호하며 그의 암살이 부당하다고 로마 시민들을 설득하여 여론을 반전시켰다. 6월에 그는 카이사르 군대의 힘을 빌려 카실피나 갈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65]키케로는 끈질기게 안토니우스를 비난했고, 이에 힘입어 기원전 43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군권을 주고 그해의 집정관 두 명과 함께 안토니우스를 공격하게 했다. 4월 안토니우스는 포룸 갈로룸과 무티나에서 패하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퇴각했다. 두 명의 집정관은 죽고 옥타비아누스가 혼자 권력을 차지하자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집정관직을 수여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집정관에 취임했다. 그동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합세하여 세력을 불렸다.[166]
카이사르 암살 후,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에게서 유언장을 비롯한 기밀 문서를 받았다.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등 주요 카이사르 휘하 장군들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복수를 원하는 기병대장 레피두스 등을 제지하며 사태 수습에 힘썼다.
3월 17일 원로원 회의에서 안토니우스와 키케로의 주도로 카이사르 정책 계승과 암살자들 석방이라는 타협안이 결정되었다. 3월 20일, 안토니우스는 추도 연설과 유언을 공개하여 민중을 열광시켰고, 암살자들은 로마에서 쫓겨났다.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추도 연설에서 카이사르의 업적을 칭송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이사르만이 모든 적을 물리쳤습니다. 300년 전 이 도시를 습격한 재앙에 대해 오직 그만이 복수를 했고, 우리의 도시를 불태운 전례 없는 짓을 한 야만인들을 복종시켰습니다!”'''
키케로는 탄핵 연설 『필리피카』에서 안토니우스를 맹렬히 비난하며,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를 법무관 대리직에 임명하고, 집정관 히르티우스, 판사와 함께 안토니우스 토벌군을 파병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총독 임지에 있었으나, 암살자 중 한 명인 데키무스의 저항과 옥타비아누스 등의 포위로 위기에 몰렸다. 4월 무티나 전투에서 히르티우스와 판사를 전사시켰지만 패배하여 후퇴했다. 그러나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와 합류, 레피두스가 지배하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3. 제2차 삼두정치
기원전 43년 11월 초,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그리스에서 반(反) 카이사르파를 규합해 군대를 조직하자,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에서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만나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5년 기한의 독재통치 협정을 맺었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구역인 동방 속주를 둘러보면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타르수스로 불러 반란 혐의를 조사했고, 기원전 41년과 40년의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지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로 가서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하여 동맹을 강화했다. 두 사람은 헤로데를 원조하여 유대를 다시 찾고 헤로데를 왕으로 세우기로 하는 등 동방 정책에 대해 합의했다. 그러나 기원전 38년 타렌툼에서 삼두정치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한 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파르티아 문제 지원을 의심하며 옥타비아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고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았다.
기원전 42년 로마 동부는 여러 직접 통제 속주와 속국들로 구성되었다.
구분 | 속국 및 속주명 | 위치 | 비고 |
---|---|---|---|
속주 | 마케도니아 | ||
아시아 | |||
비티니아 | |||
킬리키아 | |||
키프로스 | |||
시리아 | |||
키레나이카 | |||
속국 | 오드리시아 왕국 | 동유럽 | |
보스포루스 왕국 | 흑해 북부 해안 | ||
갈라티아, 폰투스, 카파도키아, 아르메니아 등 | 소아시아 | 여러 작은 왕국들 | |
유대 왕국, 코마게네, 나바테아 왕국 | 근동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아프리카 |
기원전 41년 10월, 안토니우스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나 동맹을 강화하고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이후 두 사람은 기원전 41년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보냈고,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쌍둥이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를 낳았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0년 클레오파트라에게 키프로스에 대한 공식적인 통제권을 선물했다.[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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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자금으로 안토니우스는 다시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의 개선식을 모방한 가짜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자녀들에게 둘러싸여 옥타비아누스와의 동맹을 끝내고, 자녀들에게 왕국을 분배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과 함께 왕중왕이자 이집트의 여왕으로 선포되었고,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적법한 아들이자 상속자로 선포되었다. 이러한 선포는 ''알렉산드리아의 기증''으로 알려졌으며, 로마와 안토니우스의 관계에 치명적인 불화를 야기했다.
클레오파트라 자녀들에게 국가를 분배하는 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입지에 즉각적인 위협은 아니었지만,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적법한 상속자로 인정한 것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매우 위험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권력 기반은 입양을 통한 카이사르와의 유대 관계였기 때문이다. 결국 삼두정치는 기원전 33년 마지막 날에 만료되었고 갱신되지 않았으며, 또 다른 내전이 시작될 상황이었다.
3. 1. 삼두정치의 결성
기원전 43년 11월 초,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에서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만나 공식적으로 5년 기한의 독재 통치 협정을 맺고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했다.[167] 이듬해 10월 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진 두 번의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파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고,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는 패하여 자살했다. 이로써 카이사르파에 반대하는 공화파가 모두 제거되자 제2차 삼두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와 동방 속주,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속주를 각각 맡아 통치하기로 하였다.안토니우스는 동방 속주를 순찰하면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타르수스로 불러 반란 혐의를 조사했고, 이후 기원전 41년과 40년의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지냈다. 한편 로마에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은 안토니우스의 세 번째 부인 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독자적으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페르시아로 퇴각하는 일이 벌어졌다. 풀비아는 반란 와중에 죽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담당한 동방 지역에서는 로마의 전통적인 적대국인 파르티아가 로마 영토인 시리아를 침공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로 가서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동방 정책에 대해 합의했는데, 헤로데를 원조하여 유대를 다시 찾고 그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또한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적질을 하던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잠시 휴전했다. 이 휴전으로 두 사람은 다시 사이가 나빠졌다. 기원전 38년 타렌툼에서 삼두정치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동방 원정에 군대를 보내겠다고 합의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지원을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벌어져 안토니우스는 임신한 옥타비아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았다.
한편, 키케로에 대해 불신감을 품고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3년 8월 19일 사실상의 쿠데타로 로마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무티나 전투 직후부터 은밀히 접촉을 시도했던 안토니우스와 보노니아에서 레피두스를 포함한 삼자 회담을 가졌다. 이틀간의 협상 끝에 안토니우스가 폐지했던 독재관과 동등한 권한을 가진 임기 5년의 "국가 재건 삼인 위원회"가 창설되어 사실상의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했다. 안토니우스는 동맹의 증표로 의붓딸인 클라우디아를 옥타비아누스에게 시집보냈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 공식적으로 수립이 선포된 국가 재건 삼인 위원회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본받아 프로스크립티오를 발령하여 키케로를 포함한 수많은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에 대한 숙청을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숙청 대상이었던 삼촌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어머니 유리아의 설득으로 면제했지만, 자신을 통렬하게 비판했던 키케로에 대한 추격은 멈추지 않고 추격자를 보내 살해했다. 안토니우스가 드라벨라와의 부정 행위를 이유로 아내와 이혼한 후 재혼한, 키케로의 정적 클로디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전달받은 키케로의 머리를 모욕했다고 한다.[168]
3. 2. 필리피 전투
기원전 43년, 삼두정치 내부의 내분으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로마의 동부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대규모 군대를 모았다. 삼두정치가 아드리아해를 건너 그리스로 진입하기 전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그의 함대가 제기하는 위협에 대처해야 했다.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삼은 섹스투스는 이탈리아 해안을 습격하고 삼두정치를 봉쇄했다.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는 레기움에서 남부 이탈리아 본토에 대한 섹스투스의 공격을 막았지만, 함대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이어진 해전에서 패배했다. 안토니우스가 함대를 이끌고 도착했을 때에야 봉쇄가 깨졌다. 봉쇄는 깨졌지만 시칠리아의 통제권은 섹스투스의 손에 남았고, '해방자들'(liberatores)의 패배가 삼두정치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기원전 42년 여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19개 군단(약 10만 명의 정규 보병과 기병, 그리고 불규칙적인 보조 부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군대)[92]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항해하여 '해방자들'과 맞섰다. 레피두스는 로마를 통치했다. '해방자들'의 군대도 19개 군단을 지휘했지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단만큼 전력이 충분하지 않았다.[92] 삼두정치는 더 많은 보병을 지휘했지만, 해방자들은 더 많은 기병을 지휘했다.[93] 마케도니아를 장악한 '해방자들'은 결정적인 전투를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방어 위치를 확보한 후 해상 우세를 이용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삼두정치의 보급 기지와의 통신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들은 전쟁 자금을 불리기 위해 그리스 도시들을 약탈하는 데 지난 몇 달을 보냈고, 동부 지방의 로마 군단과 로마의 속국에서 온 징집병들과 함께 트라키아에 모였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비아 이그나티아 양쪽 고지대에 필리피 서쪽에 위치를 확보했다. 남쪽 위치는 통과할 수 없는 늪지에 고정되었고, 북쪽은 험준한 언덕으로 경계를 이루었다. 그들은 성벽과 해자로 위치를 강화할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브루투스는 북쪽에 진영을, 카시우스는 비아 이그나티아 남쪽에 진영을 차지했다. 안토니우스는 비아 이그나티아 남쪽에 군대를 배치했고, 옥타비아누스는 도로 북쪽에 군단을 배치했다. 안토니우스는 여러 번 전투를 제안했지만 '해방자들'은 방어진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남쪽의 늪지를 통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위치를 은밀하게 우회하려고 시도했고, 이는 기원전 42년 10월 3일 전투를 촉발했다.
옥타비아누스가 당일 아팠기 때문에 안토니우스가 삼두정치의 군대를 지휘했고, 카시우스와 맞선 우익을 직접 통제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진영에 남아 있었고 그의 부관들이 브루투스와 맞선 좌익에 위치했다. 필립피 제1차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를 물리치고 그의 진영을 점령했지만, 브루투스는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삼두정치의 진영으로 진입했지만 아픈 옥타비아누스를 포로로 잡을 수 없었다. 전투는 전술적으로 비겼지만, 의사소통 부재로 카시우스는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했다고 믿고 포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살했다.
브루투스는 군대의 단독 지휘권을 맡았고 공개적인 갈등보다 소모전을 선호했다. 그러나 그의 장교들은 이러한 방어 전술에 불만을 품었고 그의 카이사르파 베테랑들은 배반을 위협하여 브루투스는 10월 23일 필립피 제2차 전투에서 전투를 벌이게 했다. 전투는 처음에는 균형을 이루었지만, 안토니우스의 지휘 아래 브루투스의 군대가 패배했다. 브루투스는 패배한 다음 날 자살했고, 그의 군대의 나머지는 삼두정치에 충성을 맹세했다. 두 전투에서 5만 명이 넘는 로마인이 사망했다. 안토니우스는 패배자들을 관대하게 다루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포로들을 잔인하게 다루었고 심지어 브루투스의 시체를 참수하기까지 했다.[94][95][96]
필립피 전투는 삼두정치에 유리하게 내전을 끝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패배로 로마 세계의 삼두정치 통제에 도전할 세력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그의 함대만 남았다. 안토니우스는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하여 로마 내에서 정치적 우위를 확립했다.
3. 3. 동방 통치와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
기원전 43년 11월 초,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그리스에서 반(反) 카이사르파를 규합하여 군대를 조직하자,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에서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만나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5년 기한의 독재통치 협정을 맺었다. 이듬해 10월, 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진 두 번의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파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패배하여 자살했다. 이로써 카이사르파에 반대하는 공화파가 모두 제거되자 제2차 삼두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와 동방 속주,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속주를 각각 맡아 통치하기로 합의했다.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구역인 동방 속주를 둘러보면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타르수스로 불러 반란 혐의를 조사했다. 이후 기원전 41년과 40년의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지냈다. 한편,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은 안토니우스의 세 번째 부인 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독자적으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반란을 주동하고 로마를 잠시 장악했다가 실패하고 페르시아로 퇴각하는 일이 벌어졌다. 풀비아는 반란 와중에 사망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담당한 동방 지역에서는 로마의 전통적인 적대국인 파르티아가 로마 영토인 시리아를 침공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탈리아로 가서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이후 두 사람은 동방 정책에 대해 합의했는데, 헤로데를 원조하여 유대를 다시 찾고 헤로데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또한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적질을 하던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잠시나마 휴전을 했다. 이 휴전으로 두 사람은 다시 사이가 나빠졌다. 기원전 38년 타렌툼에서 삼두정치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동방 원정에 군대를 보내겠다고 합의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지원을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벌어져 안토니우스는 임신한 옥타비아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았다.
기원전 42년 로마 동부는 여러 직접 통제 속주와 속국들로 구성되었다. 속주에는 마케도니아, 아시아, 비티니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시리아, 키레나이카가 포함되었다. 동부 영토의 약 절반은 로마의 지시를 받는 명목상 독립된 왕국인 로마의 속국들이 통치했다. 이러한 왕국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오드리시아 왕국 (동유럽)
- 보스포루스 왕국 (흑해 북부 해안)
- 갈라티아, 폰투스, 카파도키아, 아르메니아, 그리고 소아시아의 여러 작은 왕국들
- 유대 왕국, 코마게네, 그리고 나바테아 왕국 (근동)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프리카)
기원전 41년 10월,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주요 동방 봉신국인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만날 것을 요청했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55년 이집트 원정 중에 어린 클레오파트라를 처음 만났고, 기원전 48년 카이사르가 그녀의 이복자매 아르시노에 4세의 주장에 대해 그녀를 이집트 여왕으로 지지했을 때 다시 만났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7년 카이사르와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고, 두 사람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까지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손님으로 지냈다. 카이사르 암살 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은 이집트로 돌아와 아이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기원전 42년 삼두정치는 클레오파트라가 해방자들에 반대하여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도운 것에 대한 보상으로 카이사리온의 이집트 왕으로서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웅장한 배를 타고 타르수스에 도착하여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성대한 연회에 초대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후 기원전 41년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보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와 쌍둥이 자녀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를, 기원전 36년에는 세 번째 자녀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안토니우스는 또한 카이사르의 내전의 혼란 중 기원전 47년부터 이집트의 통제하에 있었던 키프로스에 대한 공식적인 통제권을 로마에 대한 그녀의 충성에 대한 선물로 기원전 40년 클레오파트라에게 부여했다.[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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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자금으로 안토니우스는 다시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귀환 후 알렉산드리아 거리에서는 가짜 로마의 개선식이 거행되었다. 도시를 통과하는 행렬은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축하 행사를 모방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시 전체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성명을 듣기 위해 소집되었다.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자녀들에게 둘러싸인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동맹을 끝냈다.
그는 그의 자녀들에게 왕국을 분배했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의 왕으로 임명되었고(대부분 로마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였음), 그의 쌍둥이 자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받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인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과 함께 왕중왕이자 이집트의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적법한 아들이자 상속자로 선포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선포는 ''알렉산드리아의 기증''으로 알려졌으며 로마와 안토니우스의 관계에 치명적인 불화를 야기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에게 국가를 분배하는 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입지에 즉각적인 위협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적법한 상속자로 인정한 것은 매우 위험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권력 기반은 입양을 통해 카이사르와의 유대관계였는데, 이는 그에게 꼭 필요한 인기를 얻게 해주고 군단의 충성심을 보장해주었다. 이러한 상황이 위협받는 것을 옥타비아누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삼두정치는 기원전 33년 마지막 날에 만료되었고 갱신되지 않았다. 또 다른 내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4.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죽음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로마를 배신하고 파르티아에 편들었던 아르메니아 왕국을 공격하여 왕 아르타바사스 2세를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개선식을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와 아들들에게 무단으로 분할한 사실, 옥타비아누스가 공개한 유언장 내용, 정숙한 아내 옥타비아와의 일방적인 이혼 등은 로마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집트 여자이자 여왕에게 정복당해 로마인으로서의 자각을 잃은 남자"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또한, 중동의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군주들도 클레오파트라의 요구에 따라 안토니우스가 그들이 지배하던 영토[174]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넘겨주는 것을 어려워했다. 안토니우스에게 복종했던 헤로데는 한때 클레오파트라를 암살할 생각까지 했고(안토니우스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실행하지는 않았다), 나바테아 왕국의 왕 말쿠스 1세는 공개적으로 이에 따른 지불[175]을 거부하기 시작했다.[176]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실책을 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결전을 결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선전포고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와 안토니우스 세력 및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의 연합군은 그리스 악티움 해협에서 충돌했다.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패주했다.
이 패배로 승패가 결정되자, 그동안 안토니우스를 따랐던 헤로데 등도 그를 버렸다. 안토니우스 측의 원군은 시리아 총독 퀸투스 디디우스(그 또한 옥타비아누스 측 인물)와 함께 방해하거나[177], 옥타비아누스 군에 보급품을 제공하는 등 협력을 시작했다.[178]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자살은 오보였기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명령에 따라 그녀에게로 옮겨져 그녀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4. 1.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은 수많은 예술작품에 영감을 주었지만, 과장되고 미화된 면이 없지 않다. 현실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필요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자금과 보급품을 이집트에서 지원받고자 했다.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도움으로 예루살렘과 유대를 회복하고, 헤로데를 유대의 왕으로 세워 괴뢰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다음 해 시리아와 파르티아로 진군했다가 대패하여 물러났다.
로마에서는 레피두스가 정치적 실패로 실각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공화파 귀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강화하고, 안토니우스를 "정숙한 로마인 부인을 버리고 난잡한 이집트 여왕과 놀아나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라고 비난했다. 안토니우스는 여러 차례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지원으로 아르메니아 공략에 성공했다. 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로마인들에게 전통적인 로마 개선식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반감을 샀다. 개선식 직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왕중의 여왕'으로,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중왕'으로 선포했다. 또한, 그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자녀들에게도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의 왕', '시리아와 리비아의 왕' 등 거창한 칭호를 부여했다. 특히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공표되었는데, 이는 옥타비아누스와 로마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이후 2년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를 비난하는 선전전을 벌였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임을 위조하고 권력을 찬탈했다고 주장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불법으로 속주를 차지하고 원로원을 무시하며, 영토를 이집트 자식들에게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2년,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해임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했다. 그해 집정관 2명과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이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31년, 내전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에페수스, 아테네, 파트라스에 전선을 구축하고 암브라키아 만에서 주력함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이오니아해를 건너 상륙작전에 성공, 안토니우스의 주요 방어지점을 점령했다. 9월 2일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은 괴멸당하고, 두 사람은 남은 배를 끌고 이집트로 도망쳤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8월 이집트에 상륙했다. 안토니우스는 패배의 절망 속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고 믿고 자살했다. 며칠 후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카이사리온은 살해되었다.
4. 2. 알렉산드리아 기증
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는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로마인들에게 전통적인 로마 개선식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져 반감을 샀다. 개선식 직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와 아들들에게 무단으로 분할하였다.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왕중의 여왕'으로,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중왕'으로 선포했다. 또한 그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와 메디아,파르티아의 왕으로,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받았다. 특히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던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은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공표되었다.이러한 안토니우스의 발표는 옥타비아누스는 물론 로마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로마를 배신하고 파르티아에 편들었던 아르메니아 왕국을 공격하여 왕 아르타바사스 2세를 포로로 잡았다. 또한 옥타비아누스가 공개한 유언장 내용, 그리고 정숙한 아내 옥타비아와의 일방적인 이혼 등으로 로마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집트 여자이자 여왕에게 정복당해 로마인으로서의 자각을 잃은 남자"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4. 3. 옥타비아누스와의 내전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대를 회복하고, 헤로데를 유대의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이듬해 시리아와 파르티아로 진군했다가 대패하고 물러났다.[146] 이 무렵 로마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강화하며 안토니우스를 비난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며 응하지 않았다.[146]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지원으로 아르메니아 공략에 성공했다. 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로마인들에게 전통적인 로마 개선식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져 반감을 샀다.[146] 개선식 직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을 '왕중왕', '왕중 여왕'으로 선포하고 자녀들에게도 거창한 칭호를 부여했다. 특히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공표되었는데, 이는 옥타비아누스와 로마와의 단절을 의미했다.[146]
이후 2년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를 비난하는 선전전을 벌였다. 기원전 32년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해임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했다. 그해 집정관 2명과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이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147]
기원전 31년 내전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에페수스, 아테네, 파트라스에 전선을 구축하고 암브라키아 만에서 주력함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안토니우스의 주요 방어지점을 점령했다. 9월 2일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은 괴멸당했고, 두 사람은 이집트로 도망쳤다.[147]
기원전 30년 8월, 아그리파의 부대가 이집트에 상륙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오보를 듣고 자살했고, 며칠 후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카이사리온은 살해되었다.[147]
4. 4. 악티움 해전과 최후
기원전 32년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해임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해의 집정관 2명과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이 그리스에 있는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31년 내전이 시작되었고, 안토니우스는 에페수스, 아테네, 파트라스에 잇달아 전선을 구축하고 암브라키아 만에서 주력함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이탈리아에서 이오니아해를 건너는 상륙작전에 성공했고, 안토니우스의 주요 방어지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점차 분열되었고, 9월 2일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은 괴멸당하였다. 두 사람은 남은 배를 끌고 이집트로 도망했다.[148][149]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8월 아그리파와 함께 이집트를 침략했다. 다른 피난처가 없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이미 자살했다고 잘못 생각하여 칼로 자신의 배를 찔러 자살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친구들은 그를 클레오파트라가 숨어 있던 기념비로 데려갔고, 그는 그녀의 품에서 죽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사로잡힌 후 안토니우스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그녀는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 참여하게 될 운명임을 깨닫고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마침내 8월 중순에 성공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와 안틸루스를 죽였지만, 율루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안토니우스의 아이들은 살려두었고, 그들은 로마 거리를 행진했다.[174][175][176][177][178]
5. 연표
- 기원전 83년 — 로마에서 태어남
- 기원전 54년/기원전 50년 — 카이사르의 부하로 갈리아 원정 참가
- 기원전 50년 — 호민관
- 기원전 47년 — 이탈리아에서 혹독한 정치로 정치적으로 소외당함
- 기원전 44년 — 첫 번째 집정관직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공동집정관)
- 기원전 43년 —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일리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 결성
- 기원전 42년 — 가이우스 카시우스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필리피 전투에서 물리침
- 기원전 41년 — 클레오파트라와 만남
- 기원전 40년 — 로마로 귀환, 옥타비아와 결혼하고 옥타비아누스와 협정을 맺음
- 기원전 38년 — 타렌툼 협정으로 삼두 정치 기한 연장
- 기원전 36년 — 파르티아에 패배함
- 기원전 35년 — 아르메이나 왕국 정복
- 기원전 34년 —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 거행
- 기원전 33년 — 삼두 정치 종결
- 기원전 32년 — 옥타비아누스와 비난, 선전전을 벌임
- 기원전 31년 —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
- 기원전 30년 —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것으로 믿고 자살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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ユダヤ古代誌
[170]
문서
ヨセフスによるとヘロデの当初の予定は「ヒルカノスの孫のアリストブロス3世(当時12歳前後)をユダヤの王にして自分がそれを支持する形でパルティアから王扱いされたアンティゴノスに対し正当性を主張しようとした」としている。(XIV巻9章5節)
[171]
서적
ユダヤ古代誌
[172]
문서
『ユダヤ古代誌』XIV巻の終盤ではヘロデも王族であるアンティゴノスがローマ元老院で正当性の主張をされても困るので、アントニウスにここでの処刑を頼み込んでいたともしている。
[173]
서적
ユダヤ古代誌
[174]
문서
クレオパトラ名義になったのは「エレウテロス川以南にあるティルスとシドン以外の都市(現在のパレスチナ沿岸部)」と「エリコ」、他にアラビア地方も割譲されたらしいがヨセフスは正確な地名を書いてない。
[175]
문서
クレオパトラの物になった領地は元の領主が税収分だけクレオパトラに集めて渡すことになっていた。
[176]
서적
ユダヤ古代誌 XV巻4章1-5節
[177]
서적
(제목 없음)
[178]
서적
ユダヤ古代誌 XV巻6章全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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